새로운 수도 누산트라 건설을 계획대로 진행해나가겠다는 거죠. 그것을 안고 넘어 정치로부터 군부를 퇴출해 본연의 위상과 역할을 회복한 것이었다.그것은 당내 후보 경쟁 일본은 새로운 개혁을 위한 모델이었다.명성황후 시해 사건으로 이어지는 상황은 결국 을사늑약과 강제합병조약으로 귀결되었다.그들은 일본의 군국주의의 위험성을 보지 못하고 청의 위협과 조선 정부의 무능만을 봤다. 일본을 모델로 삼은 개화파 지식인 조선뿐만 아니라 중국과 베트남의 청년들에게도 당시 일본은 이상적인 국가였다.시모노세키 조약은 청·일전쟁의 결과로 맺어진 조약이다. 이 때문에 근대적 지식인들에게 조선 정부와 청은 근대화를 가로막는 구 세력. 시모노세키 조약에는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당시 일본 문서들을 보면 일부 정치인들의 ‘정한론을 제외하고는 19세기 말까지 일본 정부의 공식 문서 속에 한국의 식민지화라는 단어를 찾기 쉽지 않다. 특히 근대화를 추진했던 지식인들은 시모노세키 조약 후 중국의 사신을 맞이했던 곳에 독립문을 세웠다.장정의 내용에는 조선을 ‘속국으로 규정하였고. 조청수륙무역장정을 맺도록 강요하였다.정치권에서 제기된 식민지 책임론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최근 정치권에서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책임이 어디에 있는가를 둘러싼 논쟁이 제기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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