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에선 주로 영도에 살았다. 지금 같으면 작가도 생활인이라고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는 말이었다.국민학교(현 초등학교) 때는 통영과 부산. 나중에 자료를 보니 19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북한이 남한보다 경제력에서 앞서 있었다.아직 새마을호는 나오기 전이었지만 당시로선 최고 등급 열차였다.그러면서 작가가 물질적으로 풍족해지면 좋은 작품이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중앙정보부 불려가 반공 교육도 받아1971년 고려대 경제학과 3학년이던 필자(왼쪽)가 하숙집 친구들과 찍은 사진.미대 진학에 대해 부모의 반대가 워낙 심했다. 일본의 유명한 작가가 돈을 많이 벌고 나서 작품이 이상해졌다는 얘기도 나왔다. 수강신청을 할 때 필수 과목인 교련을 빠뜨렸다는 이유에서다.이건 푸대접 정도가 아니다. 나로선 20대 초반이라 겁도 없이 말을 꺼낸 것이지만 나중엔 후회를 많이 했다.대학 1학년 때 호남선 첫 여행길 유리창 깨진 최상급 열차에 충격 먹고 살기 힘들다 화가 꿈 포기 교련 거부로 반정부 낙인도 찍혀1971년 봄 정부가 교련 교육을 강화하자 대학가에선 반대 시위가 벌어졌다. 나중에 자료를 보니 19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북한이 남한보다 경제력에서 앞서 있었다.안타까운 소식을 듣자마자 모든 일을 제쳐 두고 달려온 사람들이었다. |
Flinks
Links